일본을 격하시키기 위해 쓰여진
책들이 한때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학자, 장관 출신, 기자 등 예리한 시각을 가졌다는 이들이 [일본적 현상]에 대해 해석해 놓은 책들이다. 일본은 전자제품의 소형화 기술에서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공격에 앞장선 이어령 박사는 이를 왜소문화의 산물로 비하시켰다.
일본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도서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저자는 이를 쓸 데 없는 책들로 채워진 질 낮은 도서관으로 비하시켰다. 하지만 일본은 전 국토가
도서관이다. 전철은 움직이는 도서관이고, 커피숍도, 음식점도 도서관이다.
"일본은 없다"의 저자는 일본의 어두운 구석들을 묘사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그보다 훨씬 더 추하고 부끄러운 현상들이 얼마든지 있다. 일본사회를 움직여 가고 있는 힘의 본질과 시스템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찰한 책은 별로 없다. 거의가 국부적인 현상들에 대해 주관적이고도 즉흥적인 해석을 담는 데 급급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그들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들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상하게 여겼던 것들도 설명을 듣고 나서는 [그것 참 훌륭하군요]하면서 감탄한다. 이러한 감탄의 과정을 통해 그들은 한국을 이해하는 것이다.
만일 어느 외국인이 한국적 현상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치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해석해서 우리를 비하시키는 책을 썼다면
우리는 그 저자를 멸시할 것이다. 염일 전선에 앞장선 저자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이와는 대조적인 책이 있다. 일본의 어느 한 젊은 경제기자가 한국경제를 진단한 [한국경제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이다. 그는 30대의 나이로 한국에서 2년간 머무르면서 한국사회를 관찰했다. 한국경제의 시스템과
본질을 매우 예리하고 교훈적으로 지적해 주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면 한국 저자들이 쓴 염일 서적들은 일본에 염한 정서라는 반작용을 확산시켰을 뿐이다. 한국엔
독서인구가 적고, 일본엔 독서인구가 많다. 염한 서적을
읽는 독자 수가 염일 서적을 읽는 독자 수보다 많다. 누가 더 손해인가?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흑백시각이 있는가 하면 시스템시각이 있다. [현상]을 보는 시각은 흑백시각 이며 [본질]을 보는 시각은 시스템시각이다. 사회적 병리현상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누가 잘못했는지를 규명해서 일벌백계 하라고 주장해 왔다. 이는 우리 국민 대다수가 흑백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누가
잘못인지를 규명하려는 것은 바보짓이다. 잘못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것이 지혜로운 자세다. 잘못의 원인을 규명해야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열 사람을 인솔해서 똑 같은 코스를 견학시켰다. 돌아와서 각자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열 사람이 본 것이 각기 달랐다. 각자는
자기 머리 속에 든 것만큼만 본 것이다. 흑백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으로부터 배우기는커녕
자기경험으로부터도 배우지 못한다. 벤치마킹이라는 책을 수십 번 읽어도 도움을 얻지 못한다. 똑같은 사고를 반복하면서도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흑백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군이 미군과 많은 접촉을 해왔다. 미군의 복장이 바뀔 때마다 한국군은 그들의
복장을 모방해 입었다. 외국에서 수많은 국제장교들이 군복을 입고 공식행사를 치렀다. 유럽장교가 한국 장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국군이 미군의
일부이냐고.
주한미국은 3만여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8군 영내에는 전술과 교리를 개발하기 위해 6백여 명의 전문인력이
상주하고 있다. 이들로부터 프로젝트를 받고 있는 인력이 미국에
6천명이나 있다. 그러나 70만 한국군에는
이러한 인력이 전혀 없다. 겉만 흉내냈지 속은 흉내내지 못한 것이다. 한국군은 미군의 속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96년 4천명의 공무원들이 싱가포르 정부에 견학을 다녀왔다. 가는 공무원마다 똑같은 것을 물었다. 싱가포르에 한국공무원이라면
지겹다라는 정서가 확산됐다. 한번 가르쳐 주면 한국 내에서 전파 좀 해보라는 것이 싱가포르 공무원의
푸념이다.
군전문가들이 2성장군과 한 팀으로 연구과제를 수행했다. 2성장군에게 전문가들이 브리핑내용을 반복해서 설명해 주었다. 2성장군이
연구결과를 장관에게 브리핑했다. 그러나 막상 장관이 질문을 던지자 그는 엉뚱한 방향으로 대답해
버렸다. A방향으로 지향됐던 결론이 순간적으로 B방향으로
돌변했다. 들을 때는 끄덕여도 들은 내용을 재창조(regeneration)할
수 있는 시각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선진국 공장을 견학했다. 산업공학 분야에 정규적인 지식을 쌓은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시스템이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견학자들에게는 자동화설비만이 보여질
뿐이다.
흑백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분야에서 수십 년간 몸담아 왔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엄청난 전문가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원주민에 불과하다. 흑백시각을 가지고 산 사람과, 시스템시각을 가지고 산 사람간에는
격차가 있다. 흑백시각 소유자가 10년을 살면 남을
정죄하는 습관이 쌓인다. 그러나 시스템시각 소유자가 10년을
살면 사물을 꿰뚫는 혜안이 길러진다. 전자는 사고력이 정지된 인생이며 후자는 창조력이 샘솟는
인생인 것이다.
2001. 11. 18
|